"세 번을 접었는데, 이번엔 왜 됐는지 알 것 같아요."
냉장고에 히라가나 표가 붙어 있었습니다. 세 번째로 붙인 거였어요. 첫 번째는 재작년 겨울, 두 번째는 작년 봄. 매번 あ부터 시작해서 た행 언저리에서 흐지부지됐고, 몇 달 지나 다시 마음먹으면 앞에 것도 이미 흐려져 있어서 또 あ부터 시작했습니다.
자막 없이 드라마를 보고 싶다는 게 원래 목표였는데, 어느 순간부터는 그 목표가 부끄러워졌어요. 글자도 못 떼는 사람이 무슨 드라마야, 하는 마음이요. 체험 수업을 신청할 때도 '이 나이에 이런 것도 못 떼서'라는 문장이 먼저 떠올랐습니다.
첫 수업에서 선생님이 물으셨어요. 매번 어디쯤에서 멈추셨냐고. 생각해보니 항상 비슷한 자리였습니다. さ랑 ち가 헷갈리기 시작하는 즈음, ぬ랑 め가 자꾸 뒤집히는 즈음. 혼자 할 땐 헷갈려도 확인해줄 사람이 없으니까 그냥 넘겼는데, 그렇게 넘긴 게 몇 개 쌓이면 뒷장을 넘길 자신이 없어지더라고요.
그래서 이번엔 순서를 버렸습니다. 헷갈리는 짝만 골라 먼저 갈라놓고, 나머지는 하루에 열 개씩 지나갔어요. 4주 만에 정리가 됐습니다. 세 번을 실패했던 게 조금 허무하기도 했어요. 실력 문제라기보다 순서 문제였나 싶어서요.
요즘은 드라마를 볼 때 눈이 자꾸 화면 구석으로 갑니다. 간판이나 표지판 같은 데요. 아직 뜻은 반도 모르는데 소리는 나거든요. 그게 은근히 재밌어서 일부러 정지 버튼을 누르고 읽어봅니다.
"실력이 없었던 게 아니라 순서를 몰랐던 거였어요."
